인류는 1000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했다. 후추를 위해 원주민을 학살했다. 차를 위해 마약을 팔았다. 고무를 위해 손을 잘랐다. 석유를 위해 정권을 무너뜨렸다. 코발트를 위해 7세 어린이를 광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21세기, 인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처방전을 썼다. ESG — 환경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투명하게 경영하라. 탄소중립 — 더 이상 지구를 태우지 마라. 역사적 반성의 산물이었다. 최소한 그렇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처방전을 쓴 의사들이 그 약을 먹지 않는다.
한 손과 다른 손 — 이중성의 구조
전 세계 기업들에게 ESG 보고서를 요구한다
분쟁 광물 사용 금지를 강제한다
공급망 인권 실사를 의무화한다
탄소중립 기준 준수를 압박한다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외친다
이란 민간인 1,455명(어린이 217명)을 폭격한다
분쟁 광물 소송을 법정에서 기각시킨다
정련소 이하 공급망은 "추적 불가"로 처리한다
자신들의 역사적 탄소 부채는 면제한다
그 질서를 가장 자주 벗어난다
규범의 적용 대상은 강자가 결정한다. 강자의 행위에는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다. 7세 콩고 어린이의 코발트 손에는 ESG 기준을 들이밀고, 테헤란 주거지구 폭격에는 "규범 기반 국제질서 수호"를 붙인다.
7세 어린이의 손과 ESG 보고서
"어느 날 큰 코발트 덩어리를 찾아 꺼냈는데 그날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 내 옆에서 땅이 무너져 형이 묻혔고 형은 죽었다. 그때 나는 1학년이었다."
— 문토쉬, 12세, 콩고민주공화국 콜웨지2024년 현재, DRC에서는 약 4만 명의 어린이가 코발트 광산에서 일한다. 일부는 7세에 불과하다. 미국 노동부는 DRC 코발트 광부의 4분의 3 이상이 강제 노동 조건 하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확인했다. 세계 코발트의 70%가 DRC에서 생산된다.
이 코발트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된다. 배터리는 전기차에 들어간다. 전기차는 탄소중립의 상징으로 팔린다. 그리고 그 전기차를 만드는 기업들의 ESG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우리는 지속가능하고 책임 있는 공급망을 운영합니다."
DRC 아동 광부 피해자 가족들이 애플, 테슬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델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기각되었다. 법원은 코발트 공급업체들이 이들 기업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린이들을 적극적으로 강제 노동시켰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구매 행위 자체는 "사업 참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콩고 정부 변호인은 애플 CEO 팀 쿡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애플의 제품은 콩고 국민의 피로 오염되어 있다."
강제 아동 노동의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매한 기업의 책임은 없다. 광석이 정련소에서 처리되고 나면 원산지를 구별할 수 없다. 기업들은 "인증된 정련소에서만 구매한다"고 ESG 보고서에 적는다. 그 정련소가 어디서 원료를 가져왔는지는 "추적 불가"로 처리된다.
1885년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인도주의와 자선"의 이름으로 착취했다. 레오폴드는 증거를 파기했다. 현대 기업들은 정련소 이하 단계를 추적 불가로 처리한다. 명분의 언어만 세련되어졌다. 구조는 140년 전과 동일하다.
ESG + 탄소중립의 이중 족쇄 — 자본은 어디로 가는가
필요하다
필요하다
필요하다
위반이다
ESG를 막는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들이 탄소중립 규범을 만든다. 역사적 탄소 부채는 면제하고 지금부터의 기준만 적용한다. 뒤늦게 산업화하려는 나라들에게 "너희는 우리가 걸어온 길로 오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도 강자의 알고리즘이다. 이번 자원은 탄소 배출권이다. ESG와 탄소중립을 동시에 충족하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그 자본을 가진 나라와 기업은 기준을 충족하고 글로벌 공급망에 남는다. 그 자본이 없는 나라와 기업은 탈락한다. 규범이 자원이 되는 순간 — 그 규범은 더 이상 윤리가 아니라 무역 장벽이다.
자원의 진화 — 강자의 알고리즘 최신 버전
자원의 형태가 마침내 물리적 물질을 넘어섰다. 이번 자원은 "도덕적 언어" 그 자체다. 규범을 설계하고 소유하는 자가 자본의 흐름을 통제한다. ESG 등급을 매기는 것은 무디스, S&P, MSCI — 선진국 금융 자본이 설계한 기관들이다.
강자의 알고리즘이 마침내 물리적 자원을 넘어 도덕을 자원화하는 데 성공했다. 후추에서 시작해서 ESG로 끝난다. 1000년 동안 자원의 형태만 바뀌었다.
지도자의 안목과 덕목 — 처방전이 작동하려면
그렇다면 이 모순은 어디서 깨질 수 있는가. 구조의 문제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구조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영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선택권을 가진 지도자들이 있다.
노예제의 경제적 수혜 구조 안에 있었다. 북부도 남부의 면화 경제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폐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전쟁의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고 암살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모든 자원과 권력이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정복과 착취를 더 확장하는 것이 쉬웠다. 그러나 그는 절제와 덕을 선택했다. 전장에서도 『명상록』을 썼다.
권력의 정점에서 백성이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기득권의 반발을 이겨내며 문자를 만들었다. 자원과 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논리를 선택했다.
ESG는 그 덕목을 시스템화하려는 시도였다. 역사적 반성의 언어로 만들어진 처방전이었다. 그러나 덕목 없는 지도자들이 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한 손으로 ESG 보고서를 요구하면서 다른 손으로 분쟁을 만들고 자원을 빼앗는 지도자들이.
인류는 1000년의 역사적 반성 끝에 처방전을 썼다. 그 처방전의 이름이 ESG다. 문제는 처방전을 쓴 의사들이 그 약을 가장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범을 만드는 것은 지식의 문제다.
규범을 지키는 것은 덕목의 문제다.
그리고 덕목은 시스템이 대신할 수 없다.
강자의 알고리즘은 1000년 동안 돌아왔다. 이제 그 알고리즘은 도덕적 언어를 입고 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먼저 보는 것이 시작이다.
"우리는 분쟁 광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라는
ESG 보고서 문장과,
그 보고서를 작성한 기업의 제품 안에 들어있는
코발트를 캔 7세 어린이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그 거리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을 "책임 있는 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ESG라는 처방전을 만든 자들이
이란을 폭격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자원 전쟁을 이어간다면 —
문제는 처방전의 내용인가,
아니면 처방전을 쓴 자들의 덕목인가?
규범을 만든 자가 규범을 지키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 우리는 그 선택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